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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적, 강압적 묘사 있음. 약수위. 트리거 요소 포함.






*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

 

후루야가 만들었던, 이젠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렸던 레몬파이를 행복한 표정으로 씹던 신이치의 눈에 어리둥절함이 깃들었다. 무슨 기억을 말하는 거예요? 여전히 손에 든 레몬파이를 입에 밀어 넣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우물거리는 입 주변에 파이의 부스러기가 묻었다. 거짓 따위는 조금도 담고 있지 않은 맑은 눈을 조용히 응시하던 후루야가 손을 뻗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걷어내었다. 별로, 별 거 아니야. 걷어낸 파이 부스러기는 자연스럽게 제 혀로 핥아낸 후였다.

 

,그걸 왜 먹어요!”

신이치 군에게 붙어 있던 게 질투가 나서?”

“...어른이 맞는지 모르겠어...”

네 앞에서는 어른 티내고 싶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정한 말투에 신이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것도 병이에요!! 남은 파이를 전부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는 평소와 같은 사랑스러운 제 아이였다.

학교 갈 거야? 어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천천히, 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한 아이를 보며 후루야가 확인하듯 물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 신이치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지만 일단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줘. 자신의 번호를 차단시켜 두었을 신이치의 휴대폰을 몰래 조작해두었던 후루야가 그 사실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후루야의 부탁에 신이치가 고개를 갸웃 비틀었다. 후루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인 아이가 먼저 나가라며 자신을 문까지 배웅해주는 후루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곧 와락, 후루야의 몸을 끌어안은 신이치가 후루야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웅얼거렸다.

 

“...후루야 씨야말로. 무슨 일 있으면 말해주기예요...”

. 그럴게 신이치 군.”

 

이제 가도 좋아. 얼굴에 흐린 미소를 띠운 후루야가 신이치의 볼을 쓰다듬었다. , 나중에 봐요? 후루야에게서 몸을 뗀 신이치가 곧 문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남자가 회색정장을 입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남자의 발이 향하는 곳은 경찰청이 아니었다.

 

*

 

하루 만에 다시 오다니, 실버블렛이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나봐?”

아니, 다시 기억해냈습니다.”

재밌었는데 꽤나 빨리 해결되어 버렸네? 뭐야. 그에게 옛 추억이라도 말하며 매달린 거야?”

“...버본의 모습으로, 그를 강간했습니다.”

 

다시 찾아온 후루야를 비웃듯이 바라보던 베르무트의 얼굴에 대답을 예상치 못한 듯 놀람이 깃들었다. 그 아이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에 불쾌함이 올라왔지만 애써 꾹 눌러낸 후루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무트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얼굴에는 의미모를 웃음기가 들어있었다.

 

, 어제는 얘기 못했던 부분이지만, 애초에 인간의 정신을 건드리는 약이었으니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잊게 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지. 특히나 당신은 본래부터 여러 모습을 그에게 드러내었으니, 그게 섞이면서 혼란이 일어났던 모양이야.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니 다행이지만, 다시 기억을 잃게 될 수도 있을 테지.”

“...없어진 기억은 다시 되찾게 만들면 그만입니다.”

하여간 당신이란 남자는 여전히 자신감 넘치네. 하지만 불안한 거잖아? 언제 후루야 레이라는 남자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게 될지 몰라서.”

 

만약 완전히 당신을 잊는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이어지는 말은 없었으나 베르무트의 질문이 들려오는 듯 했다. 후루야가 제 입술을 짓이겼다.

...그것에 대해 물으려고 온 겁니다.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베르무트가 기대었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흐응높은 콧소리에 결국 후루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까지도 흥미롭게 바라본 베르무트가 이어 말했다. 다시 버본이 되면 되잖아?

 

?”

버본으로 행동했더니 후루야 레이를 떠올렸다며? 아이러니하게 들리지만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뇌는 생각보다 자극에 약하니까 말이야. 또 기억을 잃으면, 다시 한 번 강간이라도 해보지 그래?”

 

콰앙. 유리창을 깰 듯이 주먹으로 내려친 후루야의 행동에 곁에 있던 교도관이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베르무트는 입에 걸린 웃음을 더더욱 진하게 할 뿐이었다. 당신에게 물어본 것이 실수였어. 불쾌한 시선으로 베르무트를 노려본 후루야가 다시 한 번 유리창을 내리치며 몸을 돌렸다.

,하하하하!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베르무트가 웃음으로 불규칙해진 제 숨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남자가 나간 문을 바라본 베르무트가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 이미 버본이잖아?”

 

-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어요. 수업에 들어가니까 교수님께서 또 사건이었냐고 물으셨거든요. 제가 사건 때문에 수업을 못 가는 일이 많은 건 교수님도 알고 저도 아는 일이지만 이상했어요. 저는 어제 제대로 수업을 들었는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부 어딘가 조금씩 틀어져 있는 것 같았어요. 제 기억이 조작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일이 묘하게 들어맞지 않고 어긋나 있었어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서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당연하지만 후루야 씨는 아직 집에 없어요. 당신이 오려면 한참 멀었지만 일단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닥에 앉은 채로 소파에 몸을 기댔어요. 후루야 씨 생각, 오늘 있었던 일, 사건에 대한 것.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 그것도 곧 사라져요. 깜빡이는 눈이 점점 무거워지는 거 같아요. 돌아오는 당신을 맞이하고 싶지만 아직 조금 빠른 시간이니까, 잠시 자고 일어나도 괜찮겠죠? 팔을 기댄 소파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어요. 오늘 하루의 기억이, 점점 멀어져요.

 

-

 

젠장, 그 망할 여자.

불쾌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시선으로 쌓인 제 업무를 처리해나가는 모습은 다소 위협적이었지만 업무 처리 속도는 놀랍도록 빨랐다. 그 기이한 모습을 동료들은 신기함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입을 열 생각도 못 하고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일이 왜 이렇게 많아! 신이치의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져 왔다. 베르무트의 말이 저주처럼 다가와 자신을 더 단단히 옭아매는 듯 했다. 베르무트의 말이 귓가에 맴돌며 끄집어내는 어젯밤의 기억에 후루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앞에서 탁해진 눈을 하며 멈춰 달라고 애원하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배려 없는 자신의 허리 짓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던 모습을 기억했다.

...빌어먹을. 답답해진 숨을 내쉬며 후루야가 마지막 서류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휘갈긴 글씨체로 서류 끝에 사인을 끝낸 그가 벗어두었던 제 정장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늦기 전에 아이에게 돌아가야 했다.

 

-

 

많이 아플지도 모르니까, 잘 견뎌봐.’

 

머릿속을 울리는 그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을 이제는 알아. 하나둘씩 떠오르는, 잠시 묻혀있던 밤 동안의 기억에 정신이 아찔해졌어.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던 끔찍한 괴로움이 다시 밀려와. 남자의 체액을 안쪽으로 퍼져나가는 뜨겁고 역겨운 느낌을 기억하고 있어.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 말을 속삭이던 목소리가 코난이란 이름을 입에 담았던 것이 기억나. 내가 코난이라는 걸 역시 알고 있었던 거야.

주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 있는지 귀 기울였어. 감고 있는 눈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어.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없다는 사실에 조심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어. 눈에 들어오는 건 내 몸을 기대고 있던 소파 하나. 고개를 돌려봐도 딱히 수상한 것은 보이지 않아. 밀려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리다, 몸이 굳었어. 어제의 일을 증명하는 푸른 멍 자국이 손목에 남아있었어. 나도 모르게 다른 손으로 그 손목을 만지려고 할 때, 들려오는 소리에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어.

,삐빅.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와.

 

-

 

싫어, 싫어 가까이 오지 마!!!! 나를 이 이상 죽게 만들지 마 버본!!!”

 

어디서부터 문제였나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자신은 평범하게, 모르는 척 아이를 보냈고 아이 또한 전과 같이 웃으며 자신을 대해주었을 터였다. 그런데, 왜 또 다시.

아이의 눈이 심상치 않은 것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았다. 손목에 깊게 남은 멍 자국을 다른 손으로 꽉 쥐는 모습에 분명 걱정이 먼저 앞섰다. 그러지 말라고, 그러면 더 아플 거라고. 소리로 내뱉지는 못했으나 이미 발은 아이를 향해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려던 발은 경직되어 있던 아이가 내지르는 비명에 결국 다가가지 못하고 멈췄다. 상처를 남긴 것은 분명 자신이자 버본이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늘게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아이에게로 손을 뻗고 싶은 걸까. 하지만 버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후루야 레이를 잊고, 버본을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닿은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보다도 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다시 버본이 되면 되잖아?’

 

떠오르는 목소리에 무언가 제 안에서 끊겼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이의 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후루야 레이는 잡을 수 없다. 아이의 기억에 남은 자는 그 누구도 아닌 버본뿐이라는 사실에 어느 순간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거 봐, 이 방법뿐이잖아.

그것은 자신도 아는 누군가의 잔혹한 유혹. 자신들을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제 목을 틀어막을, 구제할 수도 없는 죄악.

그러네. 조용히 대답한 남자가 웃었다. 하루 종일 찾지 못 했던 해답이, 엉켜진 제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

 

살려줘. 누가 내 목을 조르고 있어.

아니 싫어, 싫어

제발,

죽기 싫어. 도와줘

 

-

 

다시 확보된 시야에 제일 먼저 잡힌 것은 저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제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던 것처럼 제 손을 덮은 아이의 손에는 이젠 아무런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아이의 목을 감싼 제 두 손에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어뜨리고 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무슨 짓을 했던 거지? 지금의 나는 누구야?

손등에 맺힌 핏방울이 멍하니 제 시선을 잡았다. 가만히 떠도는 물음에 눈을 굴리면 미동도 없이 제 밑에서 눈을 감은 아이가, 그 목을 둥글게 감싸고 자리 잡은 시퍼런 멍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돌아가는 사고와 함께 걷잡을 수도 없이 몸이 떨려왔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급하게 한 손으로 남은 제 손을 덮고, 하얗게 일어난 채로 남아있는 붉게 젖은 손톱자국을 무감각해질 때까지 긁고 뜯었다.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듯이. 모든 감각이 죽고 나면, 마치 진짜 꿈이라도 되는 듯이.

네가 죽였어. 악마와도 같은 목소리에 숨이 멈췄다. 올라오는 옅은 혈향에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꺽꺽거린다. 조여 오는 괴로움에 눈가가 태울 듯이 뜨거웠다. 고개를 다시 들면 뿌옇게 희미해진 아이가 들어왔다. 안 돼, 제발. 무릎으로 기어가며 아이의 앞에 멈춰 섰다. 퍼렇게 남은 멍 자국을 가리려 손으로 감쌌다. 싸하게 닿아오는 약간은 낮은 체온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떨리는 모양새로 아이의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옅게, 하지만 분명하게 귓가에 닿아오는 더운 숨결에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 ,하하하. 안도에서 비롯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웃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으나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미쳐버린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다. 이미 모든 상황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웃음을 흘리며 손으로 귀를 막았다. 멈추지 않는 소리에 차라리 제 귀를 뜯어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무릎을 세우고 그 안에 고개를 파묻는다. 방울지며 떨어지는 눈물은 슬픔보다도 혼란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잃을 수 없는데.

모두를 잃은 자신에게 다가와 준 아이는 후루야에게 있어서 유일이었다. 유일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애지중지 해왔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기로 한 그 숨결이 저로 인해 멈출 뻔 했다. 후루야는 그 사실에 잠시 제 숨을 멈추었다. 지켜보고 아껴주면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차라리 자기 위안에 가까웠던 합리화가 이제는 아니라고 소리치며 저를 억눌렀다. 그 방법으로는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외침이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시끄러워!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공간을 울렸다. 그 울림에 정신을 차린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는 숨을 뱉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몸이 누워있기에는 적절하지 못하게 차가운 바닥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신이치 군. 저 혼자 중얼거린 남자가 비척거리는 몸짓으로 몸을 일으켰다. 소중하게 안아드는 아이가 제 품에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아직 날 떠나지 않았어. 감싸는 것은 기묘한 안도감이었다.

 

-

 

 

-

 

가만히 누워 잠든 아이를 보며 후루야는 자꾸만 이상한 기분에 사고가 멈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지만 않으면, 아니 내 곁에 있기만 한다면. 끊임없이 제 귀를 맴돌며 바뀌는 목소리는 높은 목소리로 제 심기를 건들기도 했고, 익숙한 목소리로 제 생각을 헤집어 놓기도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부정하고, 반박하고, 모르는 척 하고. 끊임없이 아니라고 되뇌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고, 그 지침이 졸음이라는 형태로 돌아왔을 때, 후루야는 결국 아이가 누운 침대 곁에 얼굴을 묻으며 잠을 청했다.

 

 

 

미안해, 제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기도 전에 찢어지는 듯한 굉음에 순간 귀를 막았다. 총성이 울리고, 폭탄이 터지고, 높은 타이어 스핀음이 퍼지고. 하나둘 씩 재연되는 제 동기들의 죽음에 어느새 진득한 핏물을 뒤집어 쓴 후루야가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도륵. 잿빛으로 탁해진 눈을 굴렸다. 시선의 끝에 목에 밧줄이 걸린 제 애인이 죽은 듯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팽팽히 당겨진 밧줄이, 아이의 목을 조이며 그의 몸을 끌어올렸다.

철퍽. 한 번 끌려 올라갔던 몸이 빠르게 제 앞에 떨어지며 붉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얼굴에 진득하게 묻은 붉은 것이 천천히, 선명한 감각을 남기며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악몽이다. 이건 악몽이다. 자신이 아이의 목에 남겼던 선명한 멍 자국이 그대로 나타난 것을 보며 후루야가 말을 굴렸다. 꿈인 것을 알면서도 그저 불안해져서 기괴하게 꺾인 몸에 손을 뻗으면, 붉게 적은 손 하나가 그 손목을 덥썩 잡으며 남자의 몸을 제 앞까지 가까이 끌고 왔다.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음침하게 가라앉은 심해와 같은 눈동자가 뜨이며 자신을 향했다. 제 손목을 잡은 아이의 상처에서 진물이 진득하게 배어나왔다. 생생하게 재생되는 모습과 역한 냄새에 잠시 생각을 멈추면, 아이의 입이 열리며 단어를 뱉고, 결국은 말 하나를 만들어내었다. 이제 어떻게 지킬 거야? 몸은 이미 죽어 썩어가고 있는 주제에 그 목소리는 진짜 쿠도 신이치라도 되는 듯이 뚜렷했다.

이것은 환각도 암시도 아니다. 그저 답을 찾아내기 위한, 누구도 아닌 후루야 레이의 꿈. 제 동기들의 죽음을 반복함으로서 상기시키려는 의미가 너무도 투명해서 도리어 한심해졌다. 동기들의 죽음마저 이용해가며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불신 가득한 질문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조금은, 그 종류가 다르다. 질문이 저에게, 정확히는 버본을 향한 것이라는 걸 안 순간 후루야가 천천히 웃음을 흘렸다. 우리 모두, 이젠 제정신일 수 없겠네. 죽어버린 아이의 몸이 제 앞으로 떨어지는 것은 꿈으로도 족하다. 굳어있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한 아이의 형상 또한 만족스레 휘어졌다.

 

걱정 마, 반드시 지킬 테니까. 설령 그로 인해 내가 죽게 된다고 해도.

남자가 제 손목을 붙잡은 아이를 끌어당겨, 목을 틀어쥐었다.

 

-

 

언제부턴가 악몽이 끊이질 않아. 마치 옆에 악마라도 있는 것처럼 누군가 나를 죽여 나가는 것만 같아.

곁에 누가 있는 것이 느껴져. 분명 후루야 씨겠지. 얼굴을 마주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졌어. 싫어서가 아니야. 그건 어떠한 본능에 가까웠고, 근본을 알 수 없는 분명한 두려움이었어. 왜지, 왜인 걸까. 왜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뜨겁게 제 목을 조여 오던 손길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손끝이 움찔 떨렸어. , 무엇 때문에 그 악몽에 후루야 씨가 겹치는 건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어.

 

신이치? 움찔 떨린 제 손끝을 발견한 건지 후루야 씨가 내 이름을 불렀어. 사랑하는 사람. 내가 제일 아끼고 안타까워하는, 가엾은 나의 연인. 여느 아름다운 것들이 그렇듯 후루야 씨 또한 아름다운만큼 위태로웠고, 그 때문에 항상 그 곁에 있어주고 싶었어. 그가 지금껏 곁에 두었던 다른 사람들처럼, 마치 내가 깨지기라도 할까봐 불안은 담은 눈동자는 안타까웠고, 또 너무 예뻤어. 거기에 이끌려 사랑을 했고,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깨닫는 건, 나는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었어.

불안하게 내 손을 감싸 잡는 남자의 손길에 따라 감았던 눈을 떴어. 시선을 옮기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더 제대로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어. 아파. 순간 비명을 내지를 뻔 했을 정도로, 목이 이상하게도 아파. 이를 악물며 고집스레 고개를 움직이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후루야 씨가 있어. 내 손을 덮은 후루야 씨의 손을 반대쪽 손으로 쓸었어.

 

...이상해. 후루야 씨의 손등이, 지나치게도 거칠었고, 불쾌할 정도로 진득해. 덜덜 떨리기 시작한 몸을 애써 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시선을 내려 겹쳐진 손들을 봐.

어느새 내 손에까지 옮겨 묻은 그 비릿하게 굳은 액체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어. 내 목을 조르던 남자. 분명 그 남자의 팔을 붙잡고, 긁으며 반항했고...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의문을 풀어달라는 듯 절실하게 후루야 씨를 바라보았어. 마주진 걱정이 가득한 시선에 잠시 숨을 내쉬었다가, 올라간 입 꼬리를 발견한 순간 숨이 멈춰버려. 왜 그래, 신이치 군? 굳은 내 얼굴을 발견한 후루야 씨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어. 그 목소리에서 나는 알아챌 수 있었어. 저 사람, 지금 기뻐하고 있어.

다가오는 손길에 몸을 뒤로 물려. 어째서, 도대체 왜, 저 사람이. 다가오는 손보다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결국은 그대로 따라잡혀. 그의 손에 잡히기 직전에 눈을 질끈 감으면, 느껴지는 건 볼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이었어.

...?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리며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뜨면 이번에는 나를 안아주는 후루야 씨가 있어.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어제 몹쓸 짓 당할 뻔 했으니까...”

 

그 말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졌어. 어제의 난 뭘 했었지? 의문을 품으며 아픈 고개를 들면 아까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어진 후루야 씨가 있어. 그 목소리는 차라리 아무로 토오루에 가까울 만큼, 상냥하고 조심스러워. 떠올리지 않아도 돼. 좋은 기억은 아니니까.

. 착각이었던 걸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면 이제야 이해가 될 거 같아. 분명, 어제 당했던 일에 나를 구하러 와준 후루야 씨를 겹쳐서 본 거겠지. 그런 일이 드문 건 아니니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어. 최근에는 많이 피곤하기도 했으니까.

그제야 마음을 놓고 후루야 씨에게 팔을 뻗었어. 내 옆에 누우며 소중히 품에 넣어 안아주는 온기가 좋아. 곁에 있을게. 조금 더 자도 괜찮아. 조곤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어. 포근한 온기에, 금방 눈이 무거워졌어.

 

-

 

이 모든 건 전부 널 위해서니까.

 

침대 다리에 족쇄를 마저 연결한 후루야가 눈을 감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낮게 웃었다. 이제 눈을 뜬 아이는 이제 후루야 레이를 잊는 대신, 다시는 버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후루야 레이도 그를 풀어주는 것은 포기했다. 이미 기억에 혼란이 온 이상, 언제 자신을 잊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되돌려 놓기 위해 아이를 사지로 몰아넣을 바에는 차라리 버본의 손에 떨어뜨리는 것이 나았다. 아이의 웃음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것도 완전히 지우기로 결정한 지금부터는 아무래도 좋은 사정이었다.

 

네가 원하는 게 버본이라면, 후루야 레이 정도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아이의 겁에 질린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반항할 것도 분명 알고 있었으나 놓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쿠도 신이치는 사망으로 처리 하는 게 좋을까? 복잡한 걸. 잠들어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버본이 중얼거렸다. 쿠도 유키코와 쿠도 유사쿠를 속이는 것 또한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 해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제 손에 유일하게 남은 것을 놓아줄 만큼 제 성격은 좋지 못했다. 특히나 버본이라면, 더더욱.

사랑해. 아무 것도 모른 채 뒤척이는 몸을 붙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차피 이제는 닿지 못할 속삭임이었다.

꼭 지켜줄 거니까. 버본이 기쁘게 웃었다.

 

 

 

마지막.

 

꿈을 꿨어. 아찔해질 정도로 달콤하고, 그랬기 때문에 더욱 괴로운 꿈. 내가 버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웃으면서 그에게 안기면, 그도 나의 등을 쓸어주며 웃는, 그런 지독한 꿈. 분명 꿈일 텐데도 가슴이 아릿해질 만큼 그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 같았어. 마치 소중한 거라도 되는 듯이 나를 상냥하게 다루고, 안아주었어.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한다니, 말도 안 되잖아?

어차피 전부 꿈일 뿐 인거야. 지독하게 어두운 현실이 무서워서. 그저 도망치고 싶어서 꿈을 꾼 거야. , 현실에 놓인 건, 두려움과 한치 앞도 잘 안 보이는 어둠뿐인 걸.

한 때는 기억에 혼란이 온 적이 있던 거 같아. 그가 드디어 나를 미치게 만들기라도 한 걸까. 그를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울며 매달리고 도와달라고 소리치던 때가 있었어.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마치 그가 구원자나 사랑스러운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먼저 입을 맞추고, 옷을 벗고 매달리던 그런 때가 있었어. 가엾은 쿠도 신이치. 그럴 때마다 그는 조작된 안타까움을 내보이며, 먼저 안겨오는 나를 거부도 하지 않고 잘도 받아주었어. 그렇게 하면, 다시 정신을 차린 내가 절망할 것이라는 걸 잘 알아서. 그래도, 그의 눈빛이 잠깐이라도 떨렸을까? 너무 어두워서, 내가 무엇을 본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그가 찾아와. 이젠 그를 욕하며 반항하는 것도, 설득하는 것도, 애원하는 것도 모두 지쳐버렸어. 그가 벌써 손을 써버린 건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밤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는 것뿐이니까.

버본이 웃으면서 내 볼을 쓰다듬었어. 그 손길에 눈을 질끈 감으면, 손가락 끝으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쓸어. 풀어진 단추 사이로 드러나는 쇄골에 붉게 남은 흔적 위로 입술을 부비며 아프게 멍 자국을 눌러 와. 그의 손에 옷이 힘없이 흘러내려.

차라리, 영원히 꿈에 갇혀 눈 뜨지 않았으면.

오늘도 길고 긴 어둠은 이어지고, 이 괴로움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모를 테지. 나도, 버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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